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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진우 목사

Morning QT 시편 48

최종 수정일: 2020년 11월 13일



 

Psa 48:1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 

Psa 48:2  터가 높고 아름다와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 

Psa 48:3  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피난처로 알리셨도다 

Psa 48:4  열왕이 모여 함께 지났음이여 

Psa 48:5  저희가 보고 놀라고 두려워 빨리 갔도다 

Psa 48:6  거기서 떨림이 저희를 잡으니 고통이 해산하는 여인 같도다 

Psa 48:7  주께서 동풍으로 다시스의 배를 깨뜨리시도다 

Psa 48:8  "우리가 들은 대로 만군의 여호와의 성,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보았나니 하나님이 이를 영영히 견고케 하시리로다(셀라)" 

Psa 48:9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Psa 48:10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였나이다 

Psa 48:11  주의 판단을 인하여 시온산은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지어다 

Psa 48:12  너희는 시온을 편답하고 그것을 순행하며 그 망대들을 계수하라 

Psa 48:13  그 성벽을 자세히 보고 그 궁전을 살펴서 후대에 전하라 

Psa 48:14  이 하나님은 영영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말씀으로 시작하는 오늘 여러분의 아침에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이 하나님은 영영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마지막 이 한 구절이 참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같이 갈 수 없는 것들이 대조를 이루며 우리에게 불안대신 평안을 절망 대신 희망을 더해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죽을 때까지, 곧 죽음이라는 것이 이 구절에 나와 있습니다. 죽음은 두려움입니다. 평안을 앗아가는 불안함이고, 희망의 자리에 절망을 심어 놓는 것이 죽음입니다. 우리에게는 끝이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서의 끝은 바로, 죽을 때인 것입니다. 나의 죽음과 더불어 나라는 존재도 끝이 납니다. 내가 사랑했고 내가 즐겼던 모든 관계, 인연, 장소, 물질, 다 나의 죽을 때 까지 입니다. 그럼으로 나의 죽을 때가 나의 모든 희망이 끝나는 때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절망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음과 대조되는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영영히" 라는 단어이죠. 이것은 영원을 뜻합니다. 영원과 죽음은 상반됩니다. 왜냐면 영원에는 끝이 없기 떄문입니다. 그렇기에, 영원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이 한구절에서, 영원과 죽음의 대조가 찬양의 곡조로 우리에게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영원과 죽음이라는 시간적인 관념이 지금 누구에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같이 보면 대조는 더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죽음은 우리의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죽음의 것이죠. 우리가 죽음의 포로이자, 희생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에게는 죽을 때가 정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은 어떻습니까? 영영히라는 시간을 넘어선 이 영역은 우리의 것이 아니지만, 이것이 오늘 시편에서 하나님께 붙여져서 쓰이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희망과 평안을 뜻하는 그 영역은 하나님에게 속해 있다고 이 시는 우리에게 오늘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은 영영히..."


그리고, 이 무한함이 우리 유한함을 만남을 놀라워하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 무한함의 영역과 우리 유한함의 영역이 교차할 수 있을까요?

영영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소유라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의 기자는 그 사실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니,.. 우리와 죽음은 깰 수 없는 언약 가운데 있습니다. 죄라는 조항을 통하여, 우리 모두는 죽음과의 종신 계약을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죽음에게 내 자신의 소유권을 빼앗겼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소유 할 수 있는 것이 있다고 노래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은 바로, 영영한, 하나님, 영원한 하나님입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우리 하나님" 이 말은 이 하나님의 나의 소유라는 것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이 노래의 구절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나를 죽을 때까지만 인도하시고, 끝내신다? 아니겠죠. "죽을 때까지 나를 인도하시니" 이 말은 죽을때까지 죽음의 영향에서 죽음이 줄 수 있는 모든 불안과 공포와 염려에서 우리를 그 밖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죽을 때 까지도 죽음의 계약의 영향아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그리고, 우리가 죽는 날 드디어, 우리에게 그 속박에서 완전히 자유케 하신다는 것을 찬양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문을 지나 이제 내게 완전한 자유가, 더 이상 구속함이 없는 세계가 열립니다. 그때부터 슬픔과 괴로움의 세상 살이가 끝나고, 완전한 자유가 주어집니다. 이것을 노래하는 것으로 들으셔야 합니다. 이 힘든 세상살이에서 죽을 때까지도 나를 실족함과 환란에서 건져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고, 죽음이 아닌 생명의 삶을 살게 해주시다, 이제는 그 죽음의 때를 지나면, 영원한 하나님의 영원하심이 내게도 주어진다는 것으로 들려야 되는 찬양입니다.


왜냐,, 그는 영영히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의 하나님이 영원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산자의 하나님이 영원하시다는 것과 맞아 떨어집니다. 우리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우리가 그를 우리의 하나님이라 칭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벌써 그의 영원하심이 우리의 소유가 되었다는 증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와 더불어, 그로 말미암아 영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편 48편의 또 다른 대조가 나와 있습니다.


시편 48:1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송하리로다" 2  터가 높고 아름다와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 


시편 48편의 마지막 절이 우리의 이 세상에서의 유한함과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대조시켰다면, 또한 동시에 "우리의"라는 소유함을 가지고, 이 유한함과 무한함을 묶어줌으로 찬양의 소재로 올릴 수 있었다면, 이 첫소절들은 유한함의 시간과 무한함의 시간이 마침내 경계를 허물고, 무한이 유한을 뚫고 들어온 시점을 그리며 찬양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침내, 온 세계가, 거룩한 산에 세워진 하나님의 성, 시온산에 세워진 하나님의 도성을 보고, 즐거워하고 있다-- 이것은 현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이고, 이것은 메시야가 이 땅에 강림하고 다스릴 때 일어날 일인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큰 도성, 위엄과 아름다움으로 가득찬 도성을 오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곳은 위대한 사람, 돈많고 명예있는 사람이 들어가는 성이 아닙니다. 3절을 보십시오.

시편 48:3  하나님이 그 여러 궁중에서 자기를 피난처로 알리셨도다 

우리는 궁전을 왕이 호화호식하고 자신의 명예와 부귀를 위해 꾸민 곳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 왕들과, 그런 왕궁들만 이 세상에서 보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성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든 자들을 위한 피난의 장소로써 알려진다는 것입니다. 궁전이 왕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처소가 되다니, 놀라운 것 아닙니까? 우리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여기에 대조적인 것이 또 나옵니다. 4절에서 6절을 읽어봅니다.

48:4  열왕이 모여 함께 지났음이여 5  저희가 보고 놀라고 두려워 빨리 갔도다 6 거기서 떨림이 저희를 잡으니 고통이 해산하는 여인 같도다 

그 때 열왕이 누구인지 우리는 알 길이 없습니다. 누구를 보고 말하는 지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왕들이라고 하면 세상의 권력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열왕들입니다. 만약 계시록에 나오는 열왕들이라면 세상의 가장 큰 권력자들입니다. 그들이 이 성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습니까? 세상의 가장 뛰어났던 자들, 자만했던 자들,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자랑했던 자들은 이 성을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두려워 하며, 이 성을 바라보고, 거기를 떨면서 지나갑니다. 그 두려움이 막심하여, 임산하는 여인같은 고통으로 지나간다고 합니다. 세상의 왕들은 이 성을 두려워 합니다. 이 성의 주인을 두려워 할 것입니다. 이 성이 무엇을 상징하는지가 그들을 두렵게 할 것입니다. 이제는 그들이 잘 알았던 방식, 그들이 부요케 되고, 그들이 권세를 행사할 수 있었던 모든 방식이, 이 성의 등장과 함께 모두 끝났다는 것을 그들이 알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세상이 따라 할 수 없던 통치와 통치의 장소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성도님들, 오늘 이 땅에서 내게 주어진 분깃이 너무 작더라도 고민하지 마십시오. 이 땅에서 내가 편히 쉴 한 평의 땅이라도 없더라도 너무 근심 마십시오. 우리의 일생은 잠시이고 곧 영원의 시대가 우리 눈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그때는 세상이 뽐냈던 누리던 자들의 영광과 권세와 부가 모두 불길 속에 재처럼 털려져 날아갈 것입니다. 다시스의 배들이 모두 파산합니다. 강한 동풍에 의해서 산산조각 납니다. 왕들에게 부와 영예와 사치품들을 날랐던 모든 버블경제의 악순환과 그 근간에 있던 탐욕들이 산산조각 나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는 아름다움도 원래 없었고, 영구성도 없었습니다.


반대로 우리 하나님의 성이 무엇으로 아름답게 치장되어 있는 지 보십시오. 정작 세계의 왕들은 그 성에 들어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고통스러워 하며 그곳을 속히 뜨지만, 그곳은 우리의 분깃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곳의 아름다움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 아름다움이 얼마나 놀라운지요. 우리의 육신의 눈을 호화스럽게 하는 금과 보석와 각종 진귀한 물품들로 치장된 아름다움이 아닙니다. 시편의 노래하는 자는 그것을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8절

Psa 48:8  "우리가 들은 대로 만군의 여호와의 성, 우리 하나님의 성에서 보았나니 하나님이 이를 영영히 견고케 하시리로다(셀라)

도대체 무엇을 보았을 까요? 왜 보았다는 것의 그 목적어, 본 그 대상이 누락되어 있을 까요? 우리의 신앙의 상상에 맡긴 것 같습니다. 저는 그 다음 구절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고 보고 있는 시편기자의 삶에서 그가 본 것을 보려고 생각합니다.

Psa 48:9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의 전 가운데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하였나이다 

육신의 눈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주의 인자하심을 보고 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 이것은 헤세드 곧 은혜입니다. 은혜를 보고 있습니다.

지금 내가 주의 전 가운데서 주의 인자하심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지금 유한한 현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미래의 그 시간과 만날 수 있는 놀라운 경험이라고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무한한 세상이 찾아오는 그 날, 그 전에서 내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그분의 꾸밈없는 아름다움을 체감하겠지만, 지금 시편의 저자는 지금 그것이 가능함을 찬양합니다.

같은 주의 전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주의 전과, 그 날 우리에게 다가올 주의 전은 이어져 있음을 깨우쳐야 합니다. 지금 이 전에서 내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어렴풋이 경험하고 또 좀 더 선명하게 경험하고 또 확실하게 경험하는 과정이 바로 내가 먼 훗날 그곳에 서 있음과 일치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의 아름다움은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분의 인자하심 (헤세드) 이 그의 성전의 내부를 세상의 그 어떤, 아니 온 우주의 그 어떤 자리보다 더 아름답게 만들것입니다. 내가 오늘 그의 은혜를 나의 예배의 자리에서, 나의 영혼의 성전에서 생각할 수 있다면, 그 생각은 이미 유한을 넘어서는 무한의 영역에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자리와 그 아름다움에게 까지 간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는 그 날을 고대하지만, 그 날을 오늘 이 날도 살 수 있음을 알아야 할 줄로 압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니.. 맞습니다. 오늘도 나는 유한한 세상에서 무한을 살 수 있는 이유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인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찬양하는 방식입니다. 우리는 먼 미래만을 놓고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먼 미래와 현재가 만나는 시점에서 살고 있음을 체감하고 경험할 때, 무한한 찬양과 기쁨이 울려퍼질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그리고 이 메시지를 들으시는 모든 분들, 우리는 유한한 세상에서 죽음으로 막을 내리도록 지어진 창조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한한 기쁨과 사랑안에 거할 수 있도록 창조되어진 하나님의 귀한 생명들입니다. 왜 유한한 것들을 놓고 마음 상해하며 조바심 나며 남을 미워하며 살겠습니까? 지금의 왕들을 부러워 하십니까? 그들은 그 거룩한 성에 대한 어떠한 분깃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 성의 기쁨과 아름다움과 무한함을 그들은 가질 수 없습니다. 아니 모든 인간들도 마찬가지 그 성의 기쁨과 아름다움 그리고 무한함이 주어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탐욕스럽기 때문이고, 우리 모두는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성을 이 세상에 가지고 오십니다. 그를 의지하는 자, 그의 도움을 바라는 자에게 또 그를 피난처 삼을 자들에게 그 성의 문을 열어주시기 위해서 입니다. 그 날 우리 모두는 그 성 안에서 뵈올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합니다.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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